정의를 이야기하면 그래도 들어주는 세상이라고 아직 믿고 있다. 사람들은 내게 순진하다고들 하지만, 순진한 사람들이 잘 사는 사회야말로 정의로운 사회가 아닐까? 법은 기득권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겉으로는 약자를 위한다고 표방하는 것이 또한 법이기에 부조리한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법으로써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마주한 세상의 모습을 이곳에 전한다.
＊글쓴이는 현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피해자 국선변호사, 국방부 군범죄피해자 국선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를 대리할 때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어렵게 용기 내 신고를 결심했지만, 반복적인 피해 경험 진술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조사 과정에서 경찰 등으로부터 2차 가해성 발언을 들어 상처를 받기도 하며, 가해자가 부인하는 경우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게 될까 봐 시종일관 불안감에 시달린다. 결국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송치, 불기소 처분으로 사건이 종결되는 경우 그 원통함과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왜 경찰이 불송치결정을 하고, 검찰이 불기소처분을 할까? 피해자인 당신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그럴 리 없다. 대부분은 물적 증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형사재판에서 요구되는 엄격한 증명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성폭력 범죄의 특성상 물적 증거가 있는 경우는 많지 않으며 대부분 피해자 진술이 유일한 증거일 때가 많다. 그렇다면 어떤 것들이 증거가 되고, 피해자는 무엇을 준비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조사받는 과정에서 나를 더 보호할 수 있을까? 불안과 자책으로 괴로운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변호사로서 몇 가지 조언을 하고자 한다.
1. 되도록 빨리 신고하기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면, 되도록 신속하게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좋다. 도로나 각종 장소 등에 설치된 CCTV의 보관기관은 통상 30일 정도여서 30일이 넘어가면 CCTV 자료를 확보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범행 현장에 CCTV가 없었더라도 크게 걱정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실 생각해 보라. 어느 누가 CCTV가 돌아가는 곳에서 대범하게 범행을 저지르겠는가. 기습추행과 같은 비교적 가벼운 성폭력 범죄가 아닌 강간, 준강간 등과 같은 강력범죄일수록 범행 현장에 CCTV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범행 현장이 아니더라도 범행장소에 이르기까지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모습, 범행 이후의 모습 등을 통해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나 이전에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예컨대 가해자가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범행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CCTV에 나타난 피해자와 가해자의 모습이 가해자가 피해자를 끌고 가고 있다거나 피해자가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의식이 없어 보인다면, 또 범행 이후 범행장소에서 피해자가 울면서 뛰쳐나가는 모습이 확인된다면,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는 가해자의 주장보다는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인정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 강간 등 강력범죄 피해의 경우, 곧바로 신고하면 해바라기센터에서 피해자의 신체에서 DNA를 채취함으로써 가해자의 흔적을 찾을 수 있게 되고, 이로써 성관계 증거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피해자들은 불쾌하고 수치스러운 마음에 온몸을 깨끗이 씻고 속옷 등도 세탁하거나 버리는데, 이렇게 되면 피해자 신체나 속옷 등에서 가해자의 흔적이 사라져 버려 DNA 검출을 위한 채취 절차가 의미가 없게 된다. 만약 가해자의 정액 등이 피해자의 옷에 묻었다면 이 역시 세탁하지 말고, 추후 경찰에 제출하여 DNA를 채취할 수 있도록 한다.
2. 가해자와의 대화 등 지우지 않기
피해자들은 피해를 당한 상황 자체가 너무 끔찍하여 가해자를 삶에서 지우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모든 대화나 통화 내역을 홧김에 전부 삭제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가해자와 나눈 통화나 대화 내용 등도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으므로, 지우지 않는 것이 좋고 지우더라도 그 전에 모든 내용을 캡처 등을 통해 확보해 두는 것이 좋다.
CCTV와 마찬가지로, 가해자와 범행 전후로 나눈 대화 내용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기존 관계를 추단하게 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 본래 어떤 관계였는지, 당일 만난 경위가 어떻게 되는지 등을 살펴보아 합의에 의한 것이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늦더라도 가해자에게 항의 메시지를 보내놓는 것도 좋다. 피해 상황이 결코 피해자가 원했던 상황이 아니었던 점, 가해자의 일방적 행위였던 점을 드러내는 자료가 될 수 있다.
3.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기
성폭력 피해와 같은 엄청난 사건은 혼자 감당하며 그 고통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다. 정신적 고통 경감을 위해서도 믿을 만한 가족이나 친구에게 털어놓는 것이 좋고, 이렇게 누군가에게 이야기해 두면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추후 '피해자로부터 범행 직후 이러저러한 피해사실을 들었다'고 진술해 줄 수 있게 되어 또 하나의 유리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만약 가능하다면, 피해자 혼자 범행 피해 당시 상황을 최대한 자세하게 기록해 두는 것도 좋다. 앞서 언급했듯이, 성폭력 범죄는 그 직접 증거가 피해자 진술뿐인 경우가 많은데, 대법원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진술의 일관성과 구체성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피해 당시 상황에 대해 최대한 구체적으로 진술할수록 좋다. 이를 위해서 당시 상황을 잘 기록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잊고 싶은 기억임에도 가해자 처벌을 위해서는 또렷이 기억을 하는 것이 유리한 이 상황이 너무 안타깝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하겠다.
4. 변호사 조력 받기
직접 증거가 피해자 진술밖에 없다면 결국 피해자 진술을 신빙할 수 있느냐 여부로 범죄 성립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피해자 진술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진술 내용과 방향과 관련하여 전문가인 변호사의 조력을 받는 것이 좋다. 특히 가해자가 범행을 부인하는 상황이라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관하여 치열하게 논증해야 하므로, 변호사 조력이 더욱 요구된다.
성폭력 범죄의 경우 국가에서 국선변호사를 통해 지원해 주므로, 국선변호사 지원을 신청하여 국선변호사 조력을 받을 수 있다. 민간의 성폭력 상담소 등을 통하는 방법도 있다. 대부분의 성폭력 상담 기관들은 자문 변호사단을 꾸리고 있고, 특히 성폭력 상담기관에 연결되어 있는 변호사들의 경우 비교적 성인지감수성이 높은 변호사들이기에 보다 지지적 환경에서 상담 및 조력을 받을 수 있다.
5. 여성 수사관으로부터 조사받게 해달라고 요청하기
'성폭력범죄의 수사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규칙' 제18조 제1항에 따라, 경찰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성폭력 피해자를 동성 성폭력범죄 전담조사관이 조사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남성 경찰에게 조사를 받는 것이 불편하다면 미리 경찰에 여성 경찰관에게 조사를 받고 싶다고 요청하면 된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심리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이므로, 경찰들은 조사 시 표현 하나하나도 세심하게 살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꾸짖는 등으로 피해자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다. 여성 경찰이라고 모두 좋고, 남성 경찰이라고 모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상 아무래도 여성 경찰관이 여성의 입장을 보다 잘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여성 경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기를 권하는 편이다.
6. 범죄피해평가 받기
'범죄피해평가'는 '피해자 지원 및 보호에 관한 규칙' 제19조에 규정되어 있는데, 피해자의 피해정도를 파악하고 보호·지원의 필요성을 판단하기 위해 피해자의 동의를 받아 범죄로 인한 신체적·심리적·경제적 피해 등을 평가하는 절차이다. 이 범죄피해평가보고서는 이후 수사기록에 첨부될 수 있다. 이는 그 자체로 피해자의 피해 상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있다. 나는 심각한 성폭력 범죄의 경우 피해자에게 범죄피해평가를 받을 것을 권하는 편이다.
7. 자책하지 말고, 용기 낸 스스로를 칭찬하기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 자신의 마음을 잘 돌보는 것이다. 많은 피해자들이 자책한다. '왜 더 강하게 거부하지 못했을까', '왜 술을 마셨을까', '왜 가해자랑 어울렸을까', '내가 만만해보이나' 등등... 피해자들의 자책은 한도 끝도 없다. 그러나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가 무언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더 강하게 거부하지 않았다고 하여, 술을 마셨다고 하여, 가해자랑 어울렸다고 하여, 피해자가 만만하게 보였다고 하여, 성폭력 범죄를 저질러도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용기 낸 당신으로 인해 또 발생할지도 모를 범죄 피해를 막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당신의 용기를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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